홍여공(洪汝恭), 1효부(孝婦) 7효자(孝子)

경기도 연천군 중면 횡산리(橫山里)에 있는 향토유적 제5호 정려각은, 조선 초 문화현령을 지낸 홍여공(洪汝恭)의 아내 동래정씨(東萊鄭氏)가 효행을 하여 나라에서 효부 정려의 포상(褒賞)으로 조선 숙종조에 건립된 것인데, 6∙25 동란때 소실되었던 것을 후손들이 1988년 복원하고 효부 동래정씨와 효자 홍한경(洪漢卿), 효자 홍림(洪霖), 효자 홍범(洪範), 효자 홍삼준(洪三俊), 효자 홍삼석(洪三錫), 효자 홍하적(洪夏績), 효자 홍종옥(洪宗沃) 등 1효부(孝婦) 7효자(孝子)를 기리고자 팔효문(八孝門)을 세웠다.

문화현령(文化縣令) 홍공(洪公)의 아버지요 정씨의 시아버지인 잠(潛)공은 자헌대부, 병조판서, 좌참찬, 문하부사를 역임하고 만년에 연로하여 등창이 나서 백약이 무효하였는데, 며느리 정씨가 밤낮을 가리지 아니하고 그 종기의 고름을 입으로 빨아내어 3일만에 시아버지를 소생시켰다. 그 지극한 효성이 사람의 입을 타고 조정에 알려져서 정려(旌閭)의 포상을 받고 정경부인(貞敬夫人)의 첩지를 받았다. 이로써 효부 정씨는 오늘날 이 고장 사람들이‘1孝婦 7孝子’라고 일컫는 홍씨(洪氏) 가문(家門)을 빛낸 주인이 되었다.

 

홍씨 가문의 7효자는 그 첫째가 이 효부 할머니의 가르침을 받은 손자(孫子)로서 통정대부(通政大夫) 이조참의(吏曹參議)를 역임하고 증(贈) 좌의정(左議政)에 추존(追尊)된 홍한경(洪漢卿)이다. 공(公)은 아버지 홍계부(洪季阜)가 전염병에 걸려 앓고 있을 때, 닭고기가 먹고 싶다는 말을 듣고도 병(病)을 더 악화시킨다는 의원(醫員)의 말 때문에, 닭고기를 드리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아버지가 졸(卒)하자 공(公)은 아버지께 닭고기를 올리지 못한 것이 한(恨)이 되어, 평생 닭고기를 먹지않았고, 아버지의 제사상(祭祀床)에는 반드시 닭고기를 구은 계적(鷄炙)을 올려 정성으로 제사를 모셨다. 공(公)은 운명할 때에도,“내가 죽은 뒤에 내 제사상에는 결코 닭고기를 올리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효행이 알려져 죽은 후 좌의정(左議政)에 증직(贈職)되었다.

 

두번째 효자인 홍림(洪霖)은 홍한경의 손자이다. 이조정랑(吏曹正郞임)을 역임한 공(公)은 어머니가 병이 들어 위독하게되자 자기의 손가락을 잘라 선혈(鮮血)을 어머니의 입에 흘려 넣어 드렸다. 기절하였던 어머니가 소생하여 천(天壽)수를 다하고 돌아가니, 홍임은 정성을 다하여 3년상을 모시고 눈물로 탈상하였다.

 

세번째 효자는 홍임의 손자인 홍범(洪範)이다. 가선대부(嘉善大夫)첨(僉)중추(中樞)를 역임한 공(公)은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를 정성으로 극진히 봉양하였다.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 피난을 다니는 중에 어머니가 병이 들어 갑자기 돌아가시자, 홍범은 예의를 지켜 지성으로 초종상(初終喪)을

잘 모셨다. 마을 사람들은 입을 모아 천하에 드문 효자라고 칭송하였다고 한다.

 

넷째와 다섯째 효자는 홍범의 아들 삼형제이다. 큰아들은 삼준(三俊), 둘째는 삼달(三達)이고, 셋째는 삼석(三錫)이다. 이들은 아버지가 치료 불가능한 종기가 나서 고통이 심할 뿐만 아니라 목숨마저 위태롭게 되자, 삼형제가 번갈아 입으로 종기의 고름을 빨아내어 6일만에 아버지를 소생시켰다. 사람들 사이에 효자로 소문이 나니, 고을 원님이 이들을 나라에 효행(孝行)으로 천거하여 첫째 삼준은 장령(掌令)을 역임하고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서되고, 둘째 삼달은 도사(都事)에 추서되고 셋째 삼석은 예조참의(禮曹參議)에 추증(追贈)되었다고 한다.

 

여섯째 효자는 홍삼준의 손자 홍하적(洪夏績)이다. 공(公)은 병에 걸린 아버지 만태(萬泰)공이 바닷고기인 방어를 먹고 싶다고 하여 냇가에 가서 울며 헤매다가, 마침내 방어 한 마리가 얕은 물에서 뛰어 놀고 있는 것을 보고 잡아다가 아버지에게 드려 병을 낫게 하였다. 이 사실이 널리 알려져 나라에서는 감역(監役)을 제수하였다고 한다.

 

일곱째 효자는 양무공신(揚武功臣) 홍하영(洪夏寧)의 자(子)인 종옥(宗沃)으로, 역시 어려서부터 성품이

효성스러웠다. 병이 위중해진 어머니 평산 신씨(平山申氏)가 혼수상태에서, “앵두가 먹고 싶다.”라고 한 말을 들었으나 당시는 9월이어서 앵두를 구할 수가 없었다. 공(公)은 나뭇잎에 단풍이 들기 시작하는 앵두나무를 바라보며, 앵두를 구해 어머니의 소원을 풀어 드릴 수 있기를 간절히 빌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앵두나무에 10여 개의 빨간 앵두가 달리는 기적이 일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이 앵두를 먹고 소생하여 천수를 누렸다. 마을 사람들이 공(公)을 하늘이 낸 효자라고 칭찬하니, 그 소문을 들은 고을 원이 그를 효행으로 나라에 천거하여 지평(持平)을 제수받게 되었다고 한다.

 

 

홍세공(洪世恭)

충헌공(忠憲公)의 생애(生涯)와 업적(業績)

공(公)은 1541년(辛丑=中宗36) 11월 7일 한성(漢城) 연방(蓮坊: 전 서울대학 자리, 지금 서울대학병원 부근)의 사제(賜第)에서 출생했다.

공(公)은 어려서 영리하고 총명했으며 망령된 말이나 우스개를 하지 않아 장래의 큰 그릇됨이 있었다.

27세 때인 정묘(丁卯: 1567=隆慶1=明宗22)년에 생원시(生員試)에 입격하고, 33세 때인 계유(癸酉: 1573=萬曆1=宣祖6)년에 명경과(明經科)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성균관 전적(典籍),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지평(持平),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호조(戶曹), 형조(刑曹)의 좌랑(佐郞)과 정랑(正郞)등을 역임하면서 남몰래 살펴서 그 잘잘못을 파헤쳐 이름을 떨쳤다. 그 뒤 서장관(書狀官)으로 연경(燕京)에 다녀와서 변무(辨誣)한 일을 복명(復命)하고, 외직인 황해도(黃海道) 도사(都事)와 해운판관(海運判官)으로 나갔다가 들어와서 성균관(成均館) 직강(直講)이 되었다가 다시 승차(陞差)되어 대동(大同)과 평양(平壤) 서윤(庶尹)으로 나가서 연무정(演武亭)을 지어 불의의 재난에 대비하고자 엄격히 조련하니 예지력 또한 뛰어났다. 봉상시(奉常寺) 정(正)으로 돌아왔다가 다시 경상도(慶尙道) 순검어사(巡檢御使)로 나가서 주군(州郡)을 규찰(糾察)하고 돌아왔다.

 

51세 때인 1581(辛卯)년에 통정대부(通政大夫)로 품계(品階)가 올라서 강계부사(江界府使)로 나갔다.

이듬해 4월에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 임금이 몽진(蒙塵)했다. 이때에 인성군(寅城君) 정철(鄭澈)이 강계(江界)의 적소(謫所: 죄인이 유배되어 있는 곳)에 있었는데 어가(御駕)가 개성(開城)에 있으면서 왕자(王子)들을 호종(護從)하라는 글을 내려 부르자 인성군(寅城君: 정철)이 가려고 하니까 공(公)이 막으면서 말하길 “공(公)의 이 름이 아직 금부(禁府)에 있는데 아직 회람하는 통지문[移文]도 없이 미리 출발해 간다는 것은 전고(典故)에 없는 일입니다.” 하며 말리자 임금이 평양에 이르러서 들으시고는 허락해서 인성군(寅城君=鄭澈)이 행재소(行在所)에 가서 예알(詣謁: 예궐하여 배알함)하여 주달(奏達)하니 사람들이 모두 말하길 “위급한 난리 때도 이와 같이 능히 옛 전법(典法)을 지키다니!” 하며 감탄했다.

이때 조정에서 공(公)의 높은 재능이 쓰여져서 호조(戶曹) 참의(參議: 정3품 당상관) 의 부름을 받아 가서 5월26일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이배(移拜)되었으며 6월에 우부승지(右副承旨)로 옮겼다가 명(命)을 받고 영변(寧邊)에 갔다가 돌아와서 호조참의(戶曹參議)에 배명(拜命)을 받았다.

 

좌의 정[左相] 인 윤두수(尹斗壽) 공(公)이 아뢰니까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상국(명나라)에 군대를 요청해 놓았으니 명나라 군대에 물건을 주어 구제할 대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되겠소.” 하며 임금이 “누가 적합하겠소?” 하고 묻자 윤공(尹斗壽)이 공(公)에 대해 얘기해 공(公)이 7월에 군량(軍糧)을 관리하는 조도사(調度使)에 배명(拜命)을 받았다.

 

공(公)은 즉시 명(命)에 따라 관서(關西)지방의 여러 고을을 순회하며 군대와 식량을 모았다. 의주(義州)에는 척후(斥候) 담당 유격(遊擊)과 조총병사(祖摁兵使)의 종사관(從事官) 심우승(沈友勝)이 도착했고. 수행 담당 유격장(遊擊將)은 양책관(良策館)에 도착하여 머물고 있은 지 여러 날이 되었다.

 

공(公)은 조총병사(祖摁兵使)의 소집 담당 유격장(遊擊將)을 따라 양책관(良策館)에서 두 장수를 기다렸다. 임금의 어가(御駕)가 출발하지 않고 임금이 양책관(良策館)에서 두 장수를 만난다기에 공(公)도 어가(御駕)를 맞아 길 좌측에서 배알하고서 좌의정(左相)의 말을 듣고는 즉시 순행(巡行)을 떠나서 7월에 희천(熙川),운천(雲 川), 박천(博川),영변(寧邊), 개천(价川)의 다섯 군(郡)에서 양곡 569석(石)을 조달해 안주(安州)에 도착했다.

 

문충공(文忠公) 류성룡(柳成龍)이 조정을 옮기면서 공(公)이 더위에 상해서 설사를 한다는 말을 듣고는 새벽부터 달려와서 밤에 태천(泰川)에 도착하여 질병이 호전되도록 고달픈 7일간을 머물면서 공(公)을 간호하며 시국의 대비책을 논의했다. 공(公)이 병으로 인해 조도업무가 늦어진데 대해 품계(品階)를 낮춰주기를 청하자 류(柳)문충공(文忠公)이 말하기를 “공(公)은 바꿀 수 없다.”며 군량(軍糧) 옮기는 것을 독촉하도록 명령했다. 그 후 복명(復命)을 하니 다시 공(公)을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제수하고 다음날 평안도 순찰사(巡察使)에 제수되어 명(命)을 받고 산성(山城)의 파수(把守) 보는 곳이 허물어진 곳을 순시(巡視)했다.

그 즈음인 8월 4일 배(配)필이신 고령박씨(高靈朴氏)께서 함경도에서 왜적(倭敵)에게 피살 당하셨다.

10월에 명령을 받고 맹산(孟山)과 영원(寧遠)의 두 군(郡)에서 시사(試射)를 하고 품신(棄申)하니 칙지(勅旨)로 집을 하사받고, 여러 고을을 두루 다니면서 병사들을 모집하고 식량을 조달했다. 12월에 행궁(行宮)과 분조(分朝)에 장계(狀啓)를 올리고 도체찰사(都體察使)와 원수(元帥)등에게 상중(喪中)에 있는 관리를 복직시켜 경영하도록 청해서 모은 재물과 얻은 쌀과 콩이 6,781석(石)이었다. 이것을 도체찰사(都體察使)와 원수(元帥)등에게 나눠서 보냈다.

 

53세 때인 계사(癸已: 1593=宣祖26)년 정월에 교체되어 상호군(上護軍: 五衛의 정3품 당하관)에 부임했다. 이때 명나라 군대가 평양을 수복하자 나머지 적들은 남도(南道)로 숨고 가토오기요마사(淸正)는 아직도 관북(關北)을 점거하고 있어서 공(公)에게 함경도(咸鏡道)를 순찰하도록 명(命)해서 창의(倡義)한 장수와 장병들과 가로 막은 적을 행군(行軍)해 가면서 죽이고 공(公)과 명나라 장수 풍중영(馮仲纓)과 김상(金湘)등과 서로 비밀리에 임기응변으로 적을 공격하여 적들을 모두 격파하고 두 장수와 함께 관서(關西)로 돌아와서 3월에 숙녕부(肅寧府)에 가서 복명(復命)을 했다. 이때 임금께서 명나라의 이여송(李如松)제독(提督)을 만나려고 다행히 숙녕(肅寧)에 있었다.

복명(復命)을 하고 관북(關北)으로 돌아가서 여러 고을을 순행(巡行)하면서 굶주린 백성들을 구휼하여 먹이고 편안하도록 했으며 범죄를 지고 감옥에 갇혀 있던 자 들을 고루 다스려 반대로 살리는 증거문서로 단죄 여부를 논하는 재판을 해서 죄를 결정하는데 밤이 새도록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함경도 길의 왜구에게 빼앗겼던 성(城)과 보루(堡壘)는 손상되고 부서졌고,기계(器械)들은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 공(公)이 함경도(咸鏡道)와 북쪽 오랑캐 땅과 인접해 있어서 되놈 도적들이 자주 노략질을 해서 왜구(倭寇)가 비록 물러갔다고 해도 하루라도 군대가 없으면 안 된다는 것을 조정(朝廷)에 계청(啓請)을 해서 병장기(兵仗器)의 조치가 시급함을 알렸다.

 

또 말하기를 난시(亂時)에 수령들이 모두 금수(禽獸)처럼 달아나 숨었지만 유독 단천군수(端川郡守) 강찬(姜燦)만은 군(郡)을 떠나지 않고 의병군(義兵軍)을 규합하여 많이 참획(斬獲)한 공(功)이 있고,경원부사(慶源府使) 오응태(吳應台)는 성(城)을 굳게 지키다가 적이 크게 몰려오자 불가함을 알고는 백성들을 가엾이 여겨 북향(北向)을 해서 통곡을 하며 떠나가 확실히 폐해를 없앴으며. 경흥(慶興)의 병졸인 김광 국(金匡國)은 되놈의 노략질에도 굴(屈)하지 않고 죽었다고 정려(旌閭) 포상(褒賞)을 요청하며 멀리 떨어진 국경 요새[絶塞]에 권장하도록 상주(上奏)했다.

 

문천군수(文川郡守)는 불법적으로 탐학(貪虐)을 하므로 파직(罷職)을 요청하는 장계(狀啓)를 올렸으며,함흥(咸興) 이남의 7개 고을이 기근(饑饉)이 들고 안변군(安邊郡)에서는 돌림병으로 죽으니 주민들에게 직권으로 조세(租稅)의 의무를 감면하거나 면제해 주도록 하고, 삼수군(三水郡)에서는 인가(人家)가 근 백 여 호(戶)인데 작년에 되놈의 노략질로 잡혀간 사람이 70여명이 되는데 재물(綿布)을 주고 쇄환(刷還) 시킬 것을 요청(要請)했다.

 

남북도(南北道)에서 적(賊)에 붙었던 자들을 법에 좇아 형벌을 받는 사람들의 처자식이 있고 배우자가 있고 없는데 따라 죄(罪)는 같아도 벌(罰)이 다른 것은 법에 어긋나니 마땅히 배우자가 있는 곳으로 귀양 보낼 것을 청(請)했다.

삼수군(三水郡)은 참으로 먼 변방으로 도내(道內)의 교생(校生: 향교 학생)들 중 군공(軍功)이 있는 사람은 내금위(內禁衛)나 사복시(司僕寺)로 배속하고 유자(儒者)의 학업(學業)을 하며 군적(軍籍)에 매이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은 별도의 논상(論賞)을 청(請) 했다.

 

역로(驛路)가 조잔(凋殘)하게 된 폐단의 이유로 병마절도사들이 래왕(來往)하면서 공무(公務) 외에 사적(私的)인 기병(騎兵)을 얻지 않도록 일체 금할 것을 상주(上奏)해서 일로(一路)의 모두가 기뻐하며 갱생(更生)되었다.

 

1593(癸已)년 6월 전주부윤(全州府尹)에 제수되어 전란으로 모두 쪼개진데다가 거듭되는 흉년이 계속되자 공(公)은 백성들을 진심으로 어루만지고 무마해서 번다함과 가렴(苛斂)을 못하게 하자 백성들이 소생됨을 얻었다. 전에 공(公)이 영남을 살피며 한 고을 원을 논박하여 파직시킨 적이 있었는데,이번엔 그 아들이 호남(湖南) 의 안렴사(按廉使)가 되어 공(公)에게 혐의를 두고 비리사실을 주워 모으고자 했으나 하나도 얻지 못할 정도로 잘 다스려졌다.

 

54세 때인 갑오(甲午: 1594=선조27)년 5월에 임금께서 공(公)의 훌륭한 공적과 드러난 명성을 들으시고 전라도(全羅道)의 관찰사(觀察使) 겸 부윤(府尹)으로 승서(陞敍)되는 배명(拜命)을 받았다.

이전에 호남의 방백(方伯)은 모두 한 번 벼슬의 기한이 차면 갈려 가는데 이처럼 부윤(府尹)을 겸하고 임기를 다시 한 번 더 함은 특지(特旨)였다.

가을에 또 큰 흉년이 들어 땅속에 숨어 살던 사람들이 도적들로 봉기했다. 김희(金希),이복(李福),강대수(姜大水)등이 남쪽 경계를 근거지로 삼아 경상우도(慶尙右道)의 도적인 고파(高波)와 박첨동(朴僉同)등과 서로 무리를 도우며 출몰하여 여러 번 관군(官軍)을 위협하여 빼앗고 북쪽의 도적인 장심절(張甚竊)은 회문산(回文 山)을 근거지로 미녀와 재화(財貨)와 소나 말을 노략질 해 가서 이런 무리가 날로 많아지자 공(公)은 비밀히 관문(關文)을 보내 8개 군(郡)의 병력을 지휘하여 방책(方策)을 받아 나무를 베어 내고 산에 불을 질러서 사방에서 좁혀 들어가니 도적들이 궤멸되어 장성(長城)으로 도주하자 관군들이 추격하여 대파(大破)시켜 도적의 세 력은 오그라들어 달아나 다시 옛 소굴로 돌아가자 관군(官軍)이 도적을 공격하여 김희(金希)등은 형벌에 복종하여 죽고 나머지 무리들을 모두 평정시킨 것은 공(公)의 힘이었다.

10월에 체찰사(體察使) 이원익(李元翼)공과 순찰사(巡察使) 권률(權慄)공을 남원 (南原)에서 만나 장계(狀啓)를 올려 변사정(邊i貞)을 교체시켜 본부(本府)의 판관(判官)인 김류(金騮)를 겸직시켜서 교룡산성(蛟龍山城: 남원 북서쪽의 석축산성)의 수어(守禦: 적의 침입을 막아 성을 지킴)를 맡겼다.

 

55세 때인 을미(乙未: 1595=선조28)년에 중국 조정에서 풍신수길(豊臣秀吉)을 일본왕(日本王)에 봉(封)하고 전쟁을 그치자는 강화(講和) 논의로 4월에 황제의 사자(使者)인 이종성(李宗城)과 양방형(楊方亨)이 전라도(本道)를 출발하여 사명(使命)을 받들고 일본을 가는데,공(公)이 연도(沿道)의 여러 고을을 순시하면서 도구를 갖주어 부지런히 도로를 닦아 험해서 사람이 다니지 못하는 곳은 승병들을 시켜서 고쳐 쌓게하고 돌아와 여산(礪山)에서 부사(副使)와 접반사(接伴使) 이항복(李恒福) 공을 맞아서 함양(咸陽)까지 바래 드리고 또 상사(上使)를 수행하여 남원(南原)에 도착했다.

이때에 이 길은 병사(兵士)의 수가 딴 길과 달리 심히 많았음은 대소(大小) 사신 행렬[使行]이 모두 이 길을 경유했기 때문이다. 유정방(劉綴方) 도독(都督)이 남원(南原)에 주둔해 있고 거의 수천이나 되는 두 사신(使臣)에 딸린 인마(人馬)가 앞뒤로 도착하여 움직이고 머문지 5~6 개월이나 되고 기타 중국 장수 및 우리나라의 사명(使命)을 띤 관리(官吏)의 수레가 계속 이어져서 맞이하고 보내는데 번거롭고, 또 그 비용도 많이 들었지만 공(公)은 이를 무사히 잘 치러냈다.

운봉(雲峯),임실(任實), 여산(礪山), 남원(南原), 전주(全州)를 경유하는 길의 관노(官奴)와 서리(胥吏)들이 뿔뿔이 흩어져서 달아나 위태롭게 되자 공(公)이 조정에 품신(稟申)하여 각사(各司)의 노비(奴婢)를 더 지급받아서 영내의 각 읍(邑)에 나눠 배속시키니 다섯 고을의 역참(驛站)이 쇄신되었으며, 말과 인부와 비용을 지불하고 종을 잘 분배하여 그 힘을 고르게 했다.

군(郡)과 읍(邑)의 창고에 저장된 양미(糧米)를 의병진(義兵陣)의 대장들이 마음대로 가져다 쓰고, 물자를 수송하게 되면 간사한 좀들로 인해 소모되어 잃어버리는 것이 거의 절반이나 되었다.

호조(戶曹: 地部衙門)에서 고쳐서 나눠준 말[斗]과 가마니는 모두 커서 옛날 것과 병행시키라고 독촉하면 일정한 수효에서 부족함이 생기게 되므로 공(公)이 장계(狀啓)를 올려 논하기를 신구(新舊)의 모양이 가지런하지 않으니 서로 비교해서 칭하지 않으면 안되므로 전곡(錢穀)의 출납을 공정하게 하고,그 해의 오랜 조세 의무를 벗은 주민에게는 혹은 전부 감(減)해 주거나 혹은 3분의 2를 감(減)해 주게 했다.

 

또 각사(各司)의 노비(奴婢)들의 신공(身貢)인 면포(綿布)를 내지 않은 사람은 쌀로 대신 납부하도록 바꾸어서 그 부담을 덜어 주었고,그 여력을 흠이 있는 정무(政務)나 폐(弊)가 되는 법으로 백성을 위해서 해(害)가 되는 자는 파면시키고 온 정성을 다 기울여 쉼 없이 방문해서 묻고 보고하여 백성들은 고무(鼓舞)적이었다.

호남(湖南)은 논이 많아서 이앙과 김매기를 제때에 하지 못하여 흉년을 초래하자 공(公)이 백성들께 먼저 가르치길 여러명이 대오를 갖춰서 양쪽에 깃발을 세우고 북을 치며 노래하며 권장하자 백성들은 흥도 나고 서로 경쟁적으로 하니 제때에 할 수 있어서 소출이 증대되었다. 지금도 공(公)이 시작했다는 풍물놀이의 아리랑과 농요(農謠)들이 전해지고 있으며, 그런 모습에서 농악대와 농군(農軍)이란 말도 이 때부터 생겼다고 한다.

 

체찰사(體察使)가 함양(咸陽)에 머물 때면 공(公)이 왕래하면서 기밀에 관한 것을 묻고 계획하여 관문(關門)을 설치해 수비를 엄중히 하며 섬진강과 팔량(八良),61 치(峙) 등지에 모두 장수를 뽑아 배치시켜 지키게 하고,담양(潭陽)과 김제(金堤)에 주진(主鎭)을 두었다.

무위(武威)와 덕화(德化)를 아울러 드리워서 무력으로 일을 처리하는 토호(土豪)는 법률로 다스리고,수령을 파직시키니 구부러져 소임을 이기지 못하던 수령들이 한길로 곧장 숙연해 졌다.

 

56세 때인 병신(丙申: 1596=宣祖29)년 6월에 임기가 만료되어 돌아와서 우부승지(右副承旨)가 되었다가 좌부승지로(左副承旨)로 바뀌었다.

8월에 형조참의(刑曹參議)를 거쳐서 다시 좌부승지(左副承旨)로 돌아왔다가 예(例)에 의거해 우승지(右承旨)로 승차(陞差)되고 또 다시 평안도(平安道) 조도사(調 度使)에 제수되었다.

이 때에는 양서(兩西: 황해도와 평안도)지방 및 근기(近畿: 서울에 가까운 지방)지방에 항복한 왜적의 수가 많아서 교만하고 횡포를 부리며 여럿이 한 곳에 모여 있으면서 노략질을 해서 도로가 단절된 때인데도 공(公)은 명(命)을 받자 단기(單騎)로 치달려 나아가 난(亂)을 만나면 낮이면 엎드려 있다가 밤이면 가서 여러 참(站)을 위험한 함정과 어려운 난관을 지나 치소(治所)에 도착했다.

 

57세 때인 정유(丁酉; 1597=선조30)년에 왜(倭)가 다시 창탈(搶奪: 폭력으로 빼앗음) 해오자 중국 조정에서 또 토벌하려고 출병(出兵)을 했다.

조정에서는 관서(關西)의 모든 일을 공(公)에게 위임해서 양곡을 모아서 군량을 수송하는 일을 맡아 다스렸다. (양곡을 모아)취하는 일을 우선적으로 힘써 해서 모자라지 않도록 하고[募粟] 기근을 구물하고[救恤] 농사를 짓게 해[課農] 모든 조치를 시행하는데 심력(心力)을 다했다.

 

무술(戊戌: 1598=선조31)년 7월 3일 격무로 인한 과로(過勞)와 왜적의 유탄으로 생긴 등창이 덧나서 열병으로 안주(安州)의 군막(軍幕)에서 향년 58세로 돌아가셔서 장단(長湍)의 판부리(板浮里) 서쪽 언덕에 경자좌(庚子坐)로 장사지냈다.

부음(訃音)을 들은 선조께서 심히 애통해 하시며 특별히 부물(賻物)을 보내어 치상케 했다.

조정(朝廷)에서는 심력(心力)을 다해 왕명(王命)으로 봉공(奉公)하다가 죽은데[竭心奉公 辛苦焦勞 竟死國事] 대해 이조참판(吏曹參判) 당성군(唐城君)으로 추증(追贈)했다가 정미(丁未: 1607=선조40)년 8월26일 호성선무(扈聖宣武) 1등 공신(功臣)에 책록하고 판서(判書)로 추증(追贈)했다가 좌찬성(左贊成)으로 추증(追贈)하고 또 정사(丁已 :1617=光海君9)년 5월25일 영의정(頜議政) 세자사(世子師) 당성부원군(唐城府院君)으로 추증(追贈)했다.

 

그 한참 후인 갑신(甲申: 1824=순조24)년에 충헌공(忠憲公 : 危身奉上曰忠,行善可紀曰憲)이란 시호(諡號)를 받았다.

또 그 뒤인 경자(庚子:1900)년에 와서야 공(公)의 문집인 봉계일고(鳳溪逸稿)가 출간(出刊)하게 됐다.

공(公)의 타고난 천성(天性)은 굳세고 바르며 정직했으며 평소에 거(居)하면서 빠른 말투나 당황한 얼굴빛을 보이지 않았으며 가정 안에서라도 게으른 모양을 볼 수가 없었다고 한다.

남의 착한 것을 들으면 옳음을 빌려서라도 미치지 못한 것처럼 하고, 선(善)하지 않은 것이 있으면 또한 조금의 용서도 없이 엄하게 자기 자신을 법도로 단속해서 보는 법도 기준대로 했다.

그 한 예(例)로 공(公)이 강계부사(江界府使)시절에 임진왜란이 나서 선조(宣祖)가 몽진(蒙塵)을 하며 강계(江界)의 적소(謫所)에 있는 정철(鄭澈)에게 빨리 왕자(王子)들을 호종(護從)하라는 당부의 명령(飭令)이 있자 정공(鄭澈)이 그냥 가려고 하니까 공(公)이 막으면서 말하길 “공(公)의 이름이 아직 죄인의 명부에 있고 아직 조회 공문[關文]도 없이 미리 출발해 간다는 것은 불가합니다.” 하며 만류해서 어려움에 임해서도 전법(典法)을 지킴이 이와 같았다.

또 다른 사례로 공(公)이 전주부윤(全州府尹)으로 있을 때 이정암(李廷齙)공이 감사(監司)로 있어 공(公)은 매일 관대(冠帶)를 하고 예(禮)를 갖춰 보기를 조금도 게으름을 보이지 않자 이정암(李廷魏)공이 그만 두게 했지만 공(公)은 변함없이 했다. 그러다가 공(公)이 감사(監司)가 되고 이공(李公)이 부윤(府尹)이 되어 이정암공의 예모(禮貌)가 다소 해이해지면 문득 그 태만을 경책하니 이공(李公)이 감탄하며 말하기를 “흥공(洪公)처럼 여丨(禮)를 엄하게 잡음에 나는 미치지 못하겠다.”라고 했다.

공(公)은 정무(政務)에 임해서는 청렴하고 자기를 규약 함에는 엄격히 해서 법도 아래서 국사(國事)를 봄이 가사(家事)를 돌보듯이 하고 시비(是非)를 반드시 분변(分辨)해서 나라의 이익이 있게 하고 백성들에게 편리하도록 함을 즐기고 좋아하는 듯 했다.

 

임진왜란[龍蛇之亂]으로 종사(宗社)가 거의 위태로운 7년 동안 임금이 거느리는 군사[王師]로 3번이나 나갔으며 공(公)이 처음으로 조도사(調度使)가 되었을 때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세신(世臣)으로써 다만 나라를 위해 죽을 것이다.”라고 하고 명(命)을 듣는 즉시 가니 류성룡(柳成龍) 정승이 누누이 칭송하여 기렸다.

관북(關北)을 순행하면서 멀리 떨어진 인적미답(人跡未踏)의 산 끝까지 몸소 가보지 않은 곳이 없어서 무릇 국경 수비[關防]의 완급(緩急),군병(軍兵)의 많고 적음,기계(器械)의 예리함과 둔함,읍(邑)길 이수(里數)의 멀고 가까움,토지의 개간(開墾)함과 안함 등 모두를 닥치는 대로 차자(劄子)에 기록하여 마치 손바닥을 보는 듯 했다. 지금도 공(公)께서 손수 그리신 동국팔도대총도(東國八道大總圖)가 전해지고 있는 것을 보면 그 치밀하고 공무(公務)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임(臨)하셨는지를 짐작할 수가 있다.

 

 

홍무적(洪茂績)

충정공(忠貞公) 홍무적(洪茂績)공의 생애(生涯)

인조 대왕(仁祖大王)께서 천명(天命)에 응해 즉위하시어 간흉(姦兇)을 주멸하고 현준(賢俊)을 진용(進用)하면서 맨 먼저 생원(生員) 홍공(洪公)을 창녕 현감(昌寧縣監)으로 삼았는데, 공은 병으로 사양하였다. 또 통진(通津)과 진천(鎭川) 현감을 삼아 마침내 육경(六卿)에 이르렀다. 효종(孝宗) 때에 미쳐 주의(注意)함이 더욱 융숭하여 초야(草野)에서 발탁해 장차 크게 쓸 인물이었는데, 마침내 병신년(丙申年, 1656년 효종 7년) 4월 21일에 졸(卒)하였다.졸하면서 스스로 명(銘)을 짓기를, “동해(東海)에 한 늙은이가 있으니, 이름은 무적(茂績), 자(字)는 면숙(勉叔)이며, 성은 홍씨(洪氏)로, 호(號)는 백석(白石)이다. 문(文)을 잘하는 것도 아니요 무(武)를 잘하는 것도 아닌데 성세(聖世)를 만나 지우(知遇)에 감격하여 생각이 있으면 반드시 아뢰고 평탄하고 험한 일을 가리지 않아 죽을 때까지 지조를 바꾸지 않았다. 참으로 나라에 이로운 일이 있으면 급류(急流)가 깊은 골짜기로 달려가듯 하였고 임금에게 무례(無禮)한 자를 보면 새매가 참새를 쫓듯 하였다. 이공(貳公, 참찬(參贊))의 반열(班列)이 귀하지 않은 바 아니고 팔순의 나이가 장수하지 않은 것이 아니네. 이제 승화(乘化)하여 죽으니 내 마음이 편안하다.” 하였다. 이는 비록 공이 자신을 일컬은 말이지만, 논하는 자들은 거의 가깝게 묘사했다고 여긴다.대개 공은 이위경(李偉卿)ㆍ윤인(尹訒)ㆍ정조(鄭造) 등이 폐모론(廢母論)을 주창(主唱)할 때를 당하여 제생(諸生)을 이끌고 그 불가함을 극언하고는 인하여 순(舜) 임금의 일로 면계(勉戒)하였다가 마침내 거제(巨濟) 바다 섬으로 배되어 계해년(癸亥年, 1623년 인조 원년)에 이르렀으니, 9년 동안이었다. 이때 백성들이 막 기름 불 속에서 나온 처지였는데, 공이 고을 수령에 임명되어 마음을 다해 무마(撫摩)하니 지친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였다.기사년(己巳年, 1629년 인조 7년)에 상(喪)을 당하고, 임신년(壬申年, 1632년 인조 10년)에 호조(戶曹)를 거쳐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을 제수했으나 사체(辭遞)되었고, 영월 군수(寧越郡守)가 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으며, 후에 김제(金堤)에는 부임했다가 즉시 돌아왔다.갑술년(甲戌年, 1634년 인조 12년)에는 추숭례(追崇禮)를 논하고 인하여 경계하기를, “2세(二世, 진(秦)나라 2세(二世) 황제)는 독단(獨斷)하다가 망하였다.”고 하였는데, 후에 임금이 미안(未安)한 하교가 있어 연달아 제명(除命)을 사양하고 향리(鄕里)에서 지냈다.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장단(長湍)에서 난리에 달려갔으나 길이 막혀 행재소(行在所)로 나아가지 못하고 원수(元帥)의 막(幕)을 따라다니는데, 원수가 영남(嶺南)에 가서 군량을 모으라고 하여 남쪽으로 내려가다 안동(安東)에 이르러 오랑캐가 물러갔다는 말을 듣고 경사(京師)로 돌아왔다.정축년(丁丑年, 1637년 인조 15년)에 잠시 공주 목사(公州牧使)가 되었다가 들어와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이 되었으며 사이사이 여러 사(司)의 정(正)을 지냈다. 기묘년(己卯年, 1639년 인조 17년) 가을에 명을 받고 해서(海西)를 염찰(廉察)하였다. 당시에 임금께서 공의 인망(人望)이 점점 중해짐을 알았고 공 역시 시사(時事)를 자임(自任)했었다. 일찍이 수천 마디의 상소를 올렸는데, 대저 ‘자강(自强)하여 치욕을 씻으라’는 것이 주요 골자였다. 다시 장령(掌令)이 되어 김자점(金自點)과 심기원(沈器遠)의 죄를 논하였다.

 

신사년(辛巳年, 1641년 인조 19년)에 특별히 사간원 사간(司諫院司諫)을 제수하면서 “그 정직(正直)함을 표창하는 것이다.” 하였다. 다시 특별히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로 승진하였으며, 임오년(壬午年, 1642년 인조 20년)에 예에 따라 우승지(右承旨)에 이르렀다가 형조 참의(刑曹參議)로 옮겼다. 또 병조 참판으로 특승(特陞)하였다. 그때 기평군(杞平君) 유백증(兪伯曾)이 승평 부원군(昇平府院君) 김유(金瑬)를 논박하자 대간(臺諫) 이만영(李晩榮)이 또 기평군 부자(父子)의 변을 논박하며 서로 비난하였으므로 공이 상소하여 말하니, 임금이 호피(虎皮)를 내려 가장(嘉獎)하였다.

 

계미년(癸未年, 1643년 인조 21년)에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황익(黃瀷)이 장관(將官)이 되어 군병을 사역(私役)하자 공이 효시(梟示)할 것을 계청(啓請)하였는데, 황익은 심기원(沈器遠)의 이목(耳目)이었다. 이어 공이 심기원의 탐욕스럽고 행실이 없는 상황을 논하였으나 요의(僚議)가 서로 어긋났고 임금 역시 상신(相臣)의 일이기 때문에 공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갑신년(甲申年, 1644년 인조 22년)에 명을 받들고 심양(瀋陽)에 사신으로 갔는데, 당시 저들이 성내는 말을 하여 사람들이 모두 공을 위해 위태롭게 여기어 조정 의논이 공을 교체해 보내지 말라고 아뢰려고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평탄하고 험함을 피하지 않는 것이 신하의 분의(分義)이다.” 하고는 상소하여 가기를 청하니, 임금이 의롭게 여겨 윤허하였다.심양에 이르러서 상사(上使) 백강(白江) 이경여(李敬輿)공과 함께 구류(拘留)당하였다. 먼저 공을 돌아가게 하자 공은 행탁(行槖)의 밑천을 다 털어서 질관(質館)의 곤핍함을 도와주었다. 이때 청음(淸陰) 문정공(文正公, 김상헌(金尙憲))이 먼저 눈집[雪窖] 속에 있다가 백강공(白江公)과 함께 시를 지어 보냈다. 공은 돌아오면서 패강(浿江)에 이르자 타고 온 준마(駿馬)를 1백 금(金)과 바꾸어 백강공에게 보냈다. 심양에 있을 때 공이 백강공에게 말하기를, “심기원은 임금을 무시하는 마음이 있다.” 하였는데, 사신을 갔다 돌아와 보니 심기원은 이미 역모로 복주(伏誅)되어 있었다. 다시 대사헌에 임명되어 일을 논하면서 더욱 아첨하지 않았다.을유년(乙酉年, 1645년 인조 23년)에 오랑캐가 급히 쌀 10만 곡(斛)을 달라고 하면서 “기일을 어기면 일을 맡은 자를 죽이겠다.” 하였다. 조정에서 공을 차출해 보내야 한다고 했는데, 공이 남에게 원망을 많이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병술년(丙戌年, 1646년 인조 24년)에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를 거쳐 대사헌이 되었다. 강빈(姜嬪, 소현 세자빈(昭顯世子嬪)인 민회빈(愍懷嬪) 강씨)의 옥사(獄事)가 일어나자 공이 아뢰기를, “강빈은 폐해야지 죽여서는 안 됩니다. 강빈을 죽이려거든 먼저 신부터 죽이십시오.” 하여 크게 임금의 뜻을 거슬러 정의(旌義)로 유배되었다가 정해년(丁亥年, 1647년 인조 25년)에 남해(南海)로 옮겼다. 장령(掌令) 이응시(李應蓍)가 상소하기를, “전하께서 일찍이 홍모(洪某)를 급암(汲黯)과 위징(魏徵)1)에 비교하셨습니다. 이제 불충(不忠)하다고 죄를 주셨으니, 한 몸을 두고 전후가 어찌 그리 다르게 대하십니까?” 하니, 이응시 역시 죄를 입어 먼 곳으로 귀양 갔고 공은 또 갑산(甲山)으로 옮겨졌다. 그때 후사(喉司)의 출납을 윤허하지 않은 것이 많았는데, 임금이 공을 생각한 나머지 오래지 않아서 홍천(洪川)으로 양이(量移)하였다. 기축년(己丑年, 1649년 효종 즉위년) 5월에 인조(仁祖)가 승하한 후 효종(孝宗)이 방귀 전리(放歸田里)를 명하였다.

 

경인년(庚寅年, 1650년 효종 원년) 봄에 나라에 대갈(大喝)이 들어 중외(中外)의 인심이 흉흉(洶洶)했으므로, 공은 감히 향리에 물러나 있을 수가 없어서 마침내 장단(長湍)에서 도성으로 들어가 서추 총관(西樞摠管)을 거쳐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으로 옮겼으며 또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변사기(邊士紀)가 김자점(金自點)의 심복(心腹)으로 수원 부사(水原府使)가 되었는데, 수원은 실로 중병(重兵)이 있는 곳이어서 공이 매우 걱정이 되어 아뢰기를, “예전에 적청2)(狄靑)이 추밀(樞密)로 조정에 있게 되자 사람들 모두가 그 어짊을 칭찬했습니다. 그러나 구양수(歐陽修)만은 파직시키기를 청하면서 말하기를, ‘당(唐)나라의 주자3)(朱泚)도 본래부터 반역자가 아니요 창졸간에 아랫사람의 핍박을 받았던 것입니다. 자고로 난역을 하는 자들도 반드시 전부 그 본심(本心)이 아니요 점점 조짐이 쌓인 데서 말미암아 잘못된 데 이르는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연로하여 쉽게 미혹되어 지나친 염려가 없지 않으나 형적(形跡)이 없는 사람에 대하여 감히 말해서는 안 될 말로 위로는 성총(聖聰)을 번거롭게 하고 아래로는 대신(大臣)의 노여움을 사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지나친 염려가 반드시 깊은 계려(計慮)가 아닐 줄을 어찌 알겠습니까? 불행하게 만일 변란이라도 있게 되면 노신(老臣)이 말하지 않았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하였다. 그러다 김자점의 모반이 발각되자 과연 변사기가 미리 모의한 바가 낭자(狼藉)해 사람들이 그제야 공의 선견지명(先見之明)에 탄복하였다. 옥사가 끝나고 특별히 두 자급(資級)을 뛰어 올려 공조 판서를 제수하니, 공이 사양하기를, “신의 망언(妄言)이 비록 징험되었으나 이는 우연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의 비답(批答)에 “경의 선견지명은 지혜요 강직함은 충이다.” 하였다.임진년(壬辰年, 1652년 효종 3년)에 우참찬(右參贊)을 배수하고, 계사년(癸巳年, 1653년 효종 4년)에 또 대사헌을 제수했으나 모두 체직하였다. 이때부터 의정부의 서벽(西壁, 우참찬을 일컫는 말)에 궐원이 생기면 공의 이름이 그 가운데 거론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다시 형조 판서가 되어 단서(端緖)가 매우 교묘한 의옥(疑獄)을 공이 한번 신문하여 즉시 판결하니, 사람들이 그 신명(神明)함을 일컬었다.병신년(丙申年, 1656년 효종 7년)에 나이 80세라 하여 정헌 대부(正憲大夫)로 승자(陞資)되어 졸(卒)하였다. 부음이 알려지자, 임금이 경도(驚悼)하여 은졸(隱卒, 관직을 추증하거나 시호를 내리는 일)의 은전을 더함이 있었다.공의 관적(貫籍)은 남양(南陽)으로, 그 윗대는 처음 중국에서 왔다. 당(唐)나라 정관 연간(貞觀年間)에 다섯 학사(學士)를 본국에 보내 가르쳤는데, 홍씨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우리 조선조에 들어와서 더욱 번성하였다. 고조 모(某, 홍약충(洪若衷))는 돈녕 부정(敦寧副正)이요, 증조 모(某, 홍계신(洪繼信))는 첨지(僉知)요, 할아버지 모(某, 홍응경(洪應卿))는 증 좌승지(左承旨)요, 아버지 모(某, 홍의필(洪義弼))는 정랑(正郞)으로 증(贈) 사인(舍人)이다. 어머니는 성씨(成氏)인데, 그 아버지는 절도사(節度使) 성세칙(成世則)이다. 공은 백부(伯父) 모(某, 홍인필(洪仁弼))에게로 출후(出後)했는데, 공의 현귀(顯貴)로 판서(判書)에 추증되고 어머니 전의 이씨(全義李氏)도 따라서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되었다.공은 효우(孝友)가 뛰어나서 동모매(同母妹)의 병이 위독하여 기절하자 손가락을 찍어 피를 흘려 넣어 주었다. 양가(養家)의 재산이 아주 넉넉했으므로 그 노비 50구(口)를 아우들에게 나누어주고는 한 담장 안에 함께 살면서 아침저녁으로 즐겁게 지내었고 외왕고(外王考)의 외부(外婦, 첩(妾))를 봉양함에 있어 은례(恩禮)를 다 갖추었으니, 이로 미루어보면 부모 섬긴 것을 알 수가 있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활달하고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해 추위에 떠는 자를 보면 문득 옷을 벗어주면서 아까워하는 기색이 없었다.만력(萬曆) 신묘년(辛卯年, 1591년 선조 24년)은 공이 15세 되는 해인데, 왜추(倭酋) 풍신 수길(豐信秀吉)이 그 임금을 시해(弑害)하고 사신을 보내 엿보려 왔으므로, 중봉(重峯) 조 선생(趙先生, 조헌(趙憲))이 상소하여 사신의 목을 베어 함(函)에 담아 중국에 주문(奏聞)하기를 청하였다. 공이 그 소식을 듣고 마음에 감동하여 가서 배알(拜謁)하니, 중봉이 크게 기이하게 여겼다. 임금을 섬기기에 미쳐서는 바른말 하는 것으로 자임(自任)하여 아는 것은 말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말한 것은 반드시 끝을 맺었으며, 여러 차례 형조를 맡았는데 억울한 사람이 없었다. 조정에 선 40년에 생계(生計)가 항상 부족하고 사는 집이 무너지고 비가 샜지만 수리하지 않았다.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백강(白江) 이경여(李敬輿), 계곡(谿谷) 장유(張維),택당(澤堂) 이식(李植),미옹(迷翁) 이명준(李命俊)공과 가장 친하게 지냈다. 고인(古人)의 책 읽기를 좋아하여 늙을 때까지 게을리 하지 않았는데, 사제문(賜祭文)에 이르기를, “강방(剛方)한 성품에 민달(敏達)한 지식(知識)이었네.” 하였으니, 이 말이 극진하다고 하겠다.부인(夫人) 광산 김씨(光山金氏)는 동지사(同知事) 김원록(金元祿)의 딸인데, 공보다 먼저 졸(卒)하여 장단(長湍) 화장산(華藏山) 자좌(子坐) 언덕에 별장(別葬)하였다. 공의 묘는 장단 백석동(白石洞) 유좌(酉坐) 언덕에 있다. 장남은 홍구주(洪九疇)이고, 다음은 홍구연(洪九淵)이고, 막내아들은 홍구소(洪九韶)이다. 강중황(姜重璜)에게 출가한 손녀는 장방(長房) 소생이요, 심석(沈晳)과 감사(監司) 정창도(丁昌燾)에게 출가한 손녀는 차방(次房) 소생이다. 계방(季房) 소생은 아들 둘로 홍만(洪萬)과 홍억(洪億)인데, 홍억은 문과(文科) 출신의 지평(持平)으로 홍구연의 후사(後嗣)가 되어 공의 제사를 모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