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홍씨(南陽洪氏)는 당홍(唐洪)과 토홍(土洪)으로 나누고, 우리 중랑장파(中郞將派)가 속한 당홍(唐洪)은 고구려 27대 영류왕때 백성의 교화를 위하여 덕학(德學)이 구비된 선비를 청하고, 당(唐) 태종(太宗)이 명하여 팔학사(八學士) 즉, 홍천하(洪天河), 은세통(殷世通), 봉수현(奉壽賢), 길녕(吉寧), 방비(房丕), 위령(魏齡), 목중(睦衶), 기모(奇牟) 등이 입조(入朝)하면서
비롯되었다. 우리 선시조(先始祖) 홍학사(洪學士) 천하공께서 백성의 교화에 힘쓰다가 보장왕 27년 고구려가 패망한 후, 신라에서도 극진한 예우(禮遇)를 받았는데 문무왕(文武王)은 당성백(唐城伯)에, 신문왕(神文王)은 태자태사((太子太師)에 봉(封)하는 등 신라의 군왕(君王)이 공(公)을 모두 스승으로 섬겼다.
중랑장파는 남양홍씨(南陽洪氏) 시조(始祖)인 고려 태조(太祖)때 개국공신 휘(諱) 은열(殷悅)공의 후손(後孫)인 17대 인종(仁宗)때 사람 휘(諱) 후(厚)공을 2세 파조(派祖)공으로 하여 천여년(千餘年)을 이어오고 있는 대종중(大宗中)이다. 태조와 인종 간은 많은 년차(年差)가 있어 파조공이 시조공의 자(子)일 수 없고 다만, 실전(失傳)된 선대(先代) 수(數)와 신상(身上)을
알 수 없으니 파조공을 시조공의 후손(後孫)인 2세로 하여 세수(世數)를 쓰고 있을 뿐이다. 최근 세차(世差) 수(數)와선대(先代)의 신상(身上)을 확인하고자 하는 노력이 있은 점은 가상한 일이고 앞으로 더욱 힘을 쏟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당성(唐城) 즉, 지금의 경기도(京畿道) 화성(華城)시 남양(南陽)이 본거지였으나 추측컨데, 파조공(派祖公)의 수(數) 선대(先代)들께서 후세(後世)에 전(傳)해오지 않는 어떤 연유로 고려 국경외(國境外) 북쪽 거란족 지역에 옮겨 터잡고 세(勢)를 넓히다가 후(厚)공에 이르러 인주(麟州)의 도령(都領)이 되어 북계(北界)
40여성을 치하(治下)에 두게 되었는데, 도령(都領)이란 고려 국경외(國境外) 일정한 지역(地域)을 다스리는 지배자(支配者)를 호칭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바, 인주도령(麟州都領)은 후(厚)공에서부터 6대를 세습(世襲)하였다. 고려 조정(朝廷)은 인주도령의 세를 두려워하여 후(厚)공에게 중랑장(中郞將)의 관직을 내리고 국경외의 평안(平安)을 꾀하였을 터인데, 이로써 우리 종중을 중랑장파(中郞將派)로 칭하는 시원(始原)이 된 것이다. 뿐 아니라 고려는 역대(歷代) 인주도령의 환심(歡心)을 사기 위하여 지속적(持續的)으로 벼슬을 내렸다.
3세 유기(惟己)공은 인주도령에 중윤(中尹)을 추봉(追封)하고 삼중대광태사(三重大匡太師)를 겸하였으며, 4세 덕(德)공은 중랑장(中郞將), 인주도령, 5세 제선(濟先)공은 검교비서(檢校秘書), 중랑장에 인주도령, 6세 인(諲)공은 초명(初名)은 대선(大宣)인데 고려사에 대순(大純)으로 기록하고 있고, 정광은청광록대부(正匡銀靑光祿大夫), 상서(尙書), 좌복사(左僕射),
응양상장군(鷹揚上將軍) 또 판위위사사(判衛衛寺事)를 역임하였다.
5대(代) 인주도령 인(諲)공은 몽고군이 고려에 침입하기 전 한때 몽고군과 합세하여 거란군을 추적하면서, 몽고군 병사들이 모두 기마병(騎馬兵)인 것에 놀라 인주군(麟州軍)의 주력(主力)이 보병(步兵)인 것과 비교하면 몽고군과의 전투는 승산이 없음을 일찌기 간파하고 있던 터에, 몽고가 살례탑을 앞세워 고려에 침입하자 려몽전선(麗蒙戰線)의 최전방인 인주도령으로서
백성들의 안위(安危)를 위하여 어쩔수 없이 몽고에 혐력하게 된다. 이를 두고 고려사(高麗史)는 인주도령이 싸우지 않고 항복하였다고 비판적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당시 세계를 정복한 몽고군의 힘을 알면서도 부질없이 대전(對戰)하여 내 백성을 죽이는 것이 옳았는지는, 조선조(朝鮮朝) 병자호란때 정승 최명길(崔鳴吉)이 백성들의 안위를 위하여 임금 인조(仁祖)로 하여금 피신하고 있던 남한산성을 나와 청태종(淸太宗) 앞에 무릎꿇고 세번 머리를 땅에 부딯는 삼전도의 굴욕을 당하면서까지 항복케함으로써 백성의 안위를 지켜낸 사실(史實)에 비교하면,
이 일은 저절로 답(答)이 될 터이다. 역사(歷史)의 평가는 공정해야 함에도 같은 일에 누구는 비판하고. 최명길은 명재상(名宰相)이라 치켜세우는가?
우리 중랑장파가 고려 국경외 북쪽에 세거(勢居)한 것과 이성계의 선대(先代)가 고려 국경외 동북쪽 여진족 지역 가까이 함경도 영흥에 거주하면서 몽고(원)로부터 천호(千戶)의 직을 받아 주변을 다스린 것과 비교되는데, 역사학자들은 이성계의 이씨(李氏)가 아닌 인주도령 홍씨(洪氏)가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세우는 것이 당시의 세(勢)로서는 당연한 흐름이었는데,
뒤바뀐 결과가 회의(懷疑)스럽다는 연구가 있다.
6세 인(諲)공의 장남(長男) 복원(福源)공과 그 일족(一族)은 원(元)에 귀화함으로써 우리와는 연(緣)이 끊어지고, 우리 중랑장파는 인(諲)공의 2남(二男) 7세(世) 백수(百壽)공으로 하여 면면(綿綿)히 이어져 오는 것인데, 7세 백수(百壽)공은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공부상서(工部尙書)의 직을 역임하였다.
8세 선(詵)공은 강녕부원군(康寧府院君), 삼중대광태사(三重大匡太師),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봉절익량공신(奉節翼亮功臣)의 직을 역임하고, 9세 수(綏)공은 강녕군(江寧君), 탁(鐸)공은 익성부원군(益城府院君), 강(綱)공은 찬성사(贊成使), 익(翊)공은 수흥부원군(壽興府院君), 10세 유(瑜)공은 봉익대부(奉翊大夫), 밀직부사(密直副使), 상재(尙載)공은 첨의평이당성군(僉議評理唐城君),
개도(開道)공은 밀직사우대언(密直司右代言), 창도(昌道)공은 상서(尙書), 천부(天富)공은 전서(典書)의 직을 역임하였다.
조선조(朝鮮朝)에서도 11세 보환(普環)공은 좌상시(左尙侍)를 역임하고, 보현(普賢)공은 가정대부(嘉靖大夫),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를 역임하고 배위(配位)인 덕수이씨(德水李氏)는 정이품(正二品) 숙녕택주(淑寧宅主)를 받으셨고, 구(矩)공은 전서(典書), 잠(潛)공은 자헌대부(資憲大夫), 병조판서(兵曹判書), 좌참찬(左參贊), 문하부사(門下府使)의 직을 역임하였다.
12세 길민(吉旼)공은 순충분의개국공신(純忠奮義開國功臣)으로 자헌대부(資憲大夫), 호조판서(戶曹判書), 집현전(集賢殿) 대제학(大提學), 남양군(南陽君)에 봉(封)해지고 시호(諡號)는 문경공(文敬公)이다. 배위(配位) 청주경씨(淸州慶氏)는 정이품(正二品) 한정택주(閑靜宅主)에 봉작(封爵)되어 시어머니 숙녕택주와 고부(姑婦)간에 택주를 봉작하는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사례(史例)를 남긴다. 공(公)은 공양왕(恭讓王) 2년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가 되었으나, 정몽주(鄭夢周)가 우정승(右政丞)에 임명되자 포은(정몽주의 호)같이 용렬(庸劣)한 자가 어찌 난국(難局)을 수습하겠느냐고 고신(告身)을 거부하였다가 파직되고, 2년 뒤 이성계(李成桂)가 조선을 개국하면서 이성계를 돕는다. 중랑장파에 내려오는 고증록(考證錄)에는 이성계로부터 공(公)이 명(明)에 가서 주원장(朱元璋)을 만나 국호(國號)를 받아 오라는 청을 받고, 이미 조선이 개국하였고 이성계가 아니면 나라를 바로잡을 인물이 달리 없다고 판단하고, 다만,
“백성을 위해서는 내가 이 일을 맡는 것이 옳다. 그러나 내가 고려 신하된 자로서는 이 일이 탐탁치 않으니, 내가 명(明)에 가서 국호를 받아오더라도 그 사실(事實)을 역사에 기록하지 말라” 는 조건부로 다녀왔다는 기록이 있다. 태조실록에는 예문관(藝文館) 학사(學士) 한상질(韓尙質)이 받아온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당시 이성계로서는 명(明)으로부터 조선건국을 승인받는 것이 당면한 대사(大事)였을 터인데, 어찌 예문관 학사 정도를 나라를 대표하여 보냈겠는가? 의문(疑問)이 든다. 그렇다면 한상질은 수행원일 것이고 공(公)이 조
을 대표하여 명에 다녀온 것을 진실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공(公)이 졸(卒)하자 태종(太宗)이 ‘공의 묘(墓)를 왕릉(王陵)에 버금하게 쓰라’고 명하였다 하여 공의 묘가 있는 경기 연천 장남 판부리 일대를 지금도 고릉동(古陵洞)이라 부른다.
여강(汝剛)공은 보문각(寶文閣) 직제학(直提學) 증(贈) 가선대부(嘉善大夫), 승정원(承政院) 도승지(都承旨)를 역임하였는데, 공(公)이 젊어서 사간(司諫)으로 있을 때 임금의 일상을 기록하겠다고 편전(보평전)에 들어서려다 태종(太宗)이 못들어 오게 명하자 편전의 뜰아래까지 진입했다가 내시들에게 부뜰려 나온 일이 있을 만큼 사간(司諫)의 직분(職分)에 충실하였다.
아우 여공(汝恭)공은 문화현령(文化縣令), 황주진관병마수군절도위(黃州鎭官兵馬水軍節度衛)를 역임하였는데, 배위(配位) 동래정씨(東來鄭)는 시아버지 잠(潛)공이 등창이 나자 사흘 밤낮으로 종기의 고름을 빨아내어 소생시킨 효부(孝婦)로서 정려부인(旌閭夫人)의 호칭을 받았다.
13세 여방(汝方)공은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 보문각(寶文閣) 대제학(大提學) 증(贈) 좌의정(左議政) 시호(諡號) 문양공(文良公)이고, 신도비(神道碑)가 있는데 그 일대가 6·25 동란때 격전지역으로 총탄에 맞아 많이 부서졌고 보수(補修)가 가능한지 연구 중에 있다. 배위(配位) 동래정씨(東來鄭氏)는 정경부인(精敬夫人)이다. 문경공과
문량공 부자(父子)간에 대제학(大提學)을 역임한 것도 전례(前例)가 없는 일이고, 양대(兩代) 불천위(不遷位) 또한 드문 일이다. 또 휘 여방공은 성종(成宗)의 어머니로서 왕비를 지내지 않고 대비(大妃)가 된 유일한 사례를 남긴 인수대비(仁粹大妃)의 외조부(外祖父)가 된다. 공(公)의 호(號)가 연주정(戀主亭)인데 연생당(戀生堂)으로 잘못 표기된 사례가 많고, 연주정은 공(公)이 경기도 연천군에 직접세운 정자(亭子) 이름이였다가 숙종조(肅宗朝)에 23세 이원(爾遠)공이 낙향(落鄕)하면서 정자 재목(材木)을 헐어 멀리 경상북도 봉화군 춘양면 소로리
운곡천변(雲谷川邊)에 옮겨 지었고 지금도 당성사(唐城祀)에 보수하여 남아 있다. 우명(禹明)공은 가선대부(嘉善大夫), 검교(檢校), 공조참판(工曹參判), 우전(禹傳)공은 중직대부(中直大夫), 적량만호(赤梁萬戶), 효영(孝瑛)공은 통정대부(通政大夫), 여주목사(驪州牧使), 약염(若濂)공은 예안현감(禮安縣監)을 역임하였다.
14세 원용(元用)공은 숭정대부(崇政大夫), 판돈녕부사(判敦寧府使), 강녕군(江寧君)에 봉해지고 시호(諡號)는 장간공(章簡公)이다. 배위(配位) 파평윤씨(坡平尹氏)는 정경부인(貞敬夫人)이며 세조(世祖)비 정희왕후(貞熹王后)의 언니가 된다. 아우 형용(亨用)공은 사직(司直), 아우 이용(利用)공은 부사(府使) 증(贈) 좌의정(左議政)이다. 억령(億齡)공은 승사랑(承仕郞),
만령(萬齡)공은 적순부위(迪順副尉), 밀양부사(密陽副使), 영효(永孝)공은 교하현감(交河縣監), 정덕(正德), 영충(永忠)공은 충좌위부사용(忠左衛副司勇), 어모장군(禦侮將軍), 영지(永智)공은 행사과(行司果), 한경(漢卿)공은 통정대부(通政大夫), 이조참의(吏曹參議), 여주목사(驪州牧使), 대구부사(大邱副使) 증(贈) 좌의정(左議政) 효행(孝行) 명(命) 정여(旌閭)하고, 내주(乃疇)공은 광록문하부사(光錄文下副使)를 역임하였다.
15세 성강(性剛)공은 가선대부(嘉善大夫), 청송도호부사(靑松都護府使), 안동진관병마수군첨절제도위(安東鎭管兵馬水軍僉節制都尉)를 역임하고, 아우 순성(循性)공은 보문각(寶文閣) 부제학(副提學)을 역임하였다. 의화(義 )공은 현감(縣監), 아우 의달(義達)공은 장령(掌令), 아우 의발(義發)공은
판관(判官), 형정(顯廷)공은 돈령정(敦寧正), 의손(義孫)공은 예안현감(禮安縣監), 형(泂)공은 창원군수(昌原郡守), 이필(爾弼)공은 직제학(直提學) 덕천군수(德川郡守), 의중(義中)공은 군기판서(軍器判書)를 역임하였다.
16세 약충(若衷)공은 통정대부(通政大夫), 여주목사(驪州牧使), 중종조(中宗朝) 정국원종공신(靖國原從功臣), 증(贈)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吏曹參判) 겸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使), 강녕군(江寧君)이다. 아우 약침(若枕)공은 돈녕부정(敦寧副正), 아우 약철(若哲)공은 사복정(司僕正) 증(贈) 승지(承旨), 귀손(貴孫)공은 석성현감(石城縣監), 선기(宣起)공은
공조전서(工曹典書)를 역임하였고, 림(霖)공은 이조정랑(吏曹正郞), 효행(孝行) 명(命) 정여(旌閭)하고, 17세 계복(繼福)공은 영평현령(永平縣令), 증(贈) 좌통례(左通禮)이시고, 윤선(潤先)공은 강음현감(江陰縣監), 유온(有溫)공은 부사정(副詞正)을 역임하고, 18세 준경(俊卿)공은 부호군(副護軍), 증(贈) 좌승지(左承旨), 언경(彦卿)공은 정선군수(旌善郡守), 석경(碩卿)공은 부호군(副護軍), 보경(輔卿)공은 가평군수(加平郡守), 이곤(以坤)공은 한성서윤(漢城庶尹), 범(範)공은 가선대부(嘉善大夫) 첨(僉) 중추(中樞)를 역임하였다.
19세 보(俌)공은 영천군수(榮川郡守), 증(贈) 숭정대부(崇政大夫) 좌찬성(左贊成)이고 배(配) 전주유씨(全州柳氏)는 정경부인(貞敬夫人)이다. 현(俔)공은 충의위(忠義衛), 간(侃)공은 판관(判官), 엄(儼)공은 여절교위(勵節校尉), 덕원(德元)공은 함양군수(咸陽郡守), 의필(義弼)공은 신천군수(信川郡守), 봉상(鳳詳)공은 부사과(副司果), 좌승지(左承旨), 구상(龜詳)공은
상원군수(詳原郡守), 치상(致詳)공은 통정대부(通政大夫), 이조참의(吏曹參議), 창세(昌世)공은 절충장군(折衝將軍), 충청수사(忠淸水使) 증(贈) 이조참판(吏曹參判), 삼준(三俊)공은 효행(孝行) 천(薦) 장령(掌令) 증(贈) 이조참판(吏曹參判)이었다,
20세 세공(世恭)공은 전라관찰사(全羅觀察使) 겸(兼) 병마수군절도사(兵馬水軍節度使), 순찰사(巡察使), 경연(經筵), 홍문관(弘文館) 예문관(藝文館) 춘추관(春秋館) 관상감(觀象監事) 세자사(世子師)를 역임하고 호성원종1등공신(扈聖原從一等功臣), 증(贈)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議政府) 영의정(領議政), 시호(諡號)는 충헌공(忠憲公)이다.
배위(配位) 고령박씨(高靈朴氏)는 정경부인(貞敬夫人)이며, 임진왜란때 함경도로 피난한 임해군, 순화군 등 왕자들을 따르다가 왜군의 추격이 급박하자 왕자들을 피신케하고 자신은 진격해오는 왜군들 앞에 정좌(正坐)하고 꾸짖으며 순절(殉節)하였다. 이 충절(忠節)은 왜군들조차 감격케하여 시신(屍身)의 목에 조선국의열부지시(朝鮮國義烈婦之屍)라 쓴 목판을 걸어 놓기까지 하였다. 이 일로 홍문(紅門)을 하사(下賜)하면서 왕(王)이 ‘부부가 나란히 기러기 같은 금슬로 목숨을 바쳐 충성하였다’ 하여 홍문안(洪門鴈)이라 한 후 우리 종가(宗家)를 홍문안집이라
부르게 된다.
세영(世英)공은 통정대부(通政大夫), 동부승지(同副承旨), 세찬(世贊)공은 군자감정(軍資監正), 증(贈)호조판서(戶曹判書)이고, 무적(茂積)공은 동부승지(同副承旨), 병조판서(兵曹判書), 형조판서(刑曹判書), 우참찬(右參贊), 대사헌(大司憲)을 역임하고 정헌대부(正憲大夫), 시호(諡號)는 충정공(忠貞公)이며, 송시열(宋時烈)이 찬(撰)한 신도비(神道碑)가 있다.
공(公)이 졸(卒)하면서 스스로 명(銘)을 짓기를, “동해(東海)에 한 늙은이가 있으니, 이름은 무적(茂績), 자(字)는 면숙(勉叔)이며, 성은 홍씨(洪氏)로, 호(號)는 백석(白石)이다. 문(文)을 잘하는 것도 아니요 무(武)를 잘하는 것도 아닌데 성세(聖世)를 만나 지우(知遇)에 감격하여 생각이 있으면 반드시 아뢰고 평탄하고 험한 일을 가리지 않아 죽을 때까지 지조를 바꾸지 않았다. 참으로 나라에 이로운 일이 있으면 급류(急流)가 깊은 골짜기로 달려가듯 하였고 임금에게 무례(無禮)한 자를 보면 새매가 참새를 쫓듯 하였다. 이공(貳公), 참찬(參贊)의
반열(班列)이 귀하지 않은 바 아니고 팔순의 나이가 장수하지 않은 것이 아니네. 이제 승화(乘化)하여 죽으니 내 마음이 편안하다.” 하였다. 이는 비록 공이 자신을 일컬은 말이지만, 논자(論者)들이 참으로 옳게 묘사했다고 하였다.
조해(朝海)공은 온양군수(溫陽郡守), 이해(以海)공은 통덕랑(通德郞), 증(贈)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 겸(兼) 경연(經筵), 참찬관(參贊官)이고, 진옥(振玉)공은 병조참판(兵曹參判), 진명(振溟)공은 선략장군(宣略將軍), 부사과(副司果), 만태(萬泰)공은 양무공신(揚武功臣), 증(贈) 좌승지(左承旨), 경우(警禹)공은 판관(判官)을 역임하였다.
진정 고려(高麗) 조선(朝鮮)에서 우리 중랑장파 선대(先代)들의 족적(足跡)이 이와 같으나 다만, 선대의 치적(治積)이 방대하여 다 열거할 수 없어 겨우 20세(世)까지 기록하고 그쳤음에도 서자(書者)는 가슴이 벅차오른다. 위에서 보듯이 우리 선조(先祖)들의 자취는 찬연(燦然)하여 다른 어떠한 문벌(門閥)에 비(比)할 바 아니다. 가(可)히 우리 중랑장파를 빼놓고는
고려, 조선의 역사(歷史)를 논(論)할 수 없다고 탄식(歎息)할만 하다. 후손(後孫)들이여! 이를 영원(永遠)히 기리고 뜻을 세워 닮을 일이다.
정유(丁酉)년 원단(元旦)
35세손 춘산(春山) 두희(斗熙) 서(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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